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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쟁취
독립전쟁동안 아메리카의 무장상선은 영국무역에 많은 손해를 입히고 있었다. 1777년 1년 동안에 나포된 영국상선이 무려 450척에 이르렀고 어느 개인 선주는 3백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물자를 약탈당하였다. 이 같은 상황변화를 계기로 영국정부가 "평화"를 고려하기 시작할 즈음, 대륙회의도 그 평화가 명예로운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 있었다. 그리하여 1799년부터 존 애덤스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표들이 영국과의 협상 테이블로 보내졌다. 아메리카 대표들은 "독립선언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한 평화협상은 할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에 영국왕은 1782년 12월5일에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아메리카의 독립선언을 승인하였다. 마침내, 1783년 9월에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평화조약은 아메리카에게 매우 유리하게 체결되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국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승인한다. 2. 아메리카의 영토는 서쪽은 미시시피강, 남쪽은 스페인령인 플로리다를 국경선으로 인정한다. 3. 아메리카 합중국은 영국상인에 대한 채무를 상환한다. 4. 아메리카 합중국은 10만 명에 달하는 왕당파의 몰수재산을 보상한다. 평화조약은 조인되었고, 아메리카 합중국은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세계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783년 파리 평화조약을 끝으로 아메리카인들은 대외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곧 아메리카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독립전쟁 중반기부터 전쟁수행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농민과 수공업자 등의 대중들이 전쟁에서 흘린 피의 대가를 요구하고 나섰다. "만약 우리가 아니었던들 아메리카는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독립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메리카 사회는 대중들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아메리카의 혁명은 대외적인 독립혁명과 대내적인 사회혁명이라는 두개의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혁명 전에는 영국정부가 인정치 않는 교파는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 종교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았으나 독립전쟁이후 1785년 버지니아 의회에서 "신앙자유법"이 제정된 후에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채택되어 마침내 아메리카에서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었고 다양한 신앙생활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경제는 외국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산물과 목재, 수산물은 수출하고 공업제품은 수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특혜관계를 청산하고 세계시장에서 자력으로 경제대국들과 경쟁을 해야만 했다. 동맹국인 프랑스도 아메리카를 단지 영국을 견제키 위한 위성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 속에서 살아 남는 길은 오직 강력한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쪽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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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헌법 제정과 연방정부의 출범
1783년 파리평화조약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메리카사람들은 통일된 국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1787년 5월25일에서 9월17일에 걸쳐 필라델피아의 정부청사에서 제헌회의를 열고 신헌법을 마련하였다. 처음 제헌회의가 열렸을 때 13주 가운데 로드아일랜드 대표가 불참하고 12주의 대표 55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워싱턴은 회의 벽두의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만약 우리가 대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우리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안건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훗날 우리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변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차 현명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더 좋게 손질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가의 기반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일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각고 끝에 마련한 신 헌법은 반드시 13개주 중 9개주 이상의 비준을 받아야만 그 효력이 발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헌법 비준 과정에서, 연방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연방헌법의 결함으로 지적되어 제임스 매디슨의 주도하에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권리장전이 원래의 헌법에 덧붙여졌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수정헌법'이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연방은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금지하고 국교제도를 도입하지 못한다. ▶둘째, 연방은 국민의 언론, 출판, 집회, 청원의 자유를 축소시키지 못한다. ▶셋째, 국민은 무기를 휴대하고 무기를 들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넷째, 국민은 부당하게 수색이나 체포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섯째, 어떠한 사람도 법의 정당한 절차 없이는 생명, 자유, 재산을 빼앗기지 않는다. ▶여섯째, 어떠한 사유재산도 정당한 보상없이 공익을 위해 강제로 사용될 수 없다. ▶일곱째, 고소를 당한 사람은 공정한 배심원들에 의해 신속하고도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여덟째, 지나치게 많은 보석금이나 벌금을 부과하거나 잔인하고 전례가 없는 가혹한 처벌을 하지 못한다. ▶아홉째, 헌법구조에 대한 원칙을 고수한다. ▶열번째, 헌법에 의해 연방정부에 구체적으로 위임되지 않은 권한은 각 주나 그 주민에게 속한다. 연방헌법은 정치적 창건기에 활약한 모든 사람들이 후세에 남긴 최대의 업적으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길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연방헌법은 그 이전의 모든 정치학자가 실현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사실- 즉, 개인 각자가 지상의 주권을 가지는 각 주를 구성단위로 하여 연합통일체를 조직하는 일 -을 가능케 하였다. 아메리카에서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1789년 1월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연방회의가 구성되었으며 각 주에서 선출된 선거인들은 뉴욕에 모여 조지 워싱턴을 연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789년 4월30일 워싱턴은 월가가 굽어보이는 연방 홀의 발코니에서 연방정부의 초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였다. 이처럼 연방정부가 출범하자 연방헌법의 인준을 끝까지 반대하던 노스캐롤라이나는 대통령 취임 후인1789년 11월에, 그리고 제헌회의에 대표조차 파견하지 않았던 로드아일랜드가 1790년 5월에 어렵게 비준을 마침으로써 아메리카 독립혁명이 평화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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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확장으로 대륙국가 형성
워싱턴 행정부는 국가적 기틀을 확립하기 위하여 기구조직을 보완개편하고 제도의 정비를 꾀했으며 국무성, 국방성, 재무성, 법무성 등을 설치하여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국가경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재무장관 해밀턴과 국무장관 제퍼슨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발생한 연방파와 공화파간의 당쟁으로 인하여 고민하던 워싱턴 대통령은 재선 임기를 마친 1796년 은퇴를 발표하였다. 워싱턴은 그 당시 헌법에 임기를 제한하는 조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고 은퇴함으로서 이후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이 재선을 마치고 물러나는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1796년 대통령선거에서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공화파의 제퍼슨은 180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퍼슨 행정부는 서부개척에 병행한 대외통상의 확대로 경제적 자립기반을 다져 나가는 데 주력하였다. 제퍼슨은 해군을 파견, 해적을 소탕하여 해외통상을 장려하였으며 1803년에는 '루이지애나'로 불리는 미시시피강 서쪽으로부터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중부지방을 프랑스 나폴레옹으로부터 1,500만달러에 매입하였다. 이는 현재 미국영토의 30%에 해당한다. 이로써 그 동안 미시시피강을 경계로 묶여 있던 합중국 영토에 서부개척의 활로를 열어 주었다. 1828년 평민출신의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때부터 미국은 정치제도와 정당 구조상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엽관제의 출현을 비롯하여 민선관리의 수적 팽창, 대통령 후보 전국지명대회 및 대통령 특별고문제도 등이 생겨났으며 양당제도가 그 뿌리를 내림으로써 어느 특정지역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독점하던 시대와는 다른 대중정치시대가 도래하였다. '엽관제'는 선거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꿈을 꿀 수도 없던 공직을 평민들이 차지할 수 있게 됨으로서 대중민주주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이후 활발하게 진행된 서부개척은 당시 멕시코영토인 텍사스지역까지 이르러1835년에는 3만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멕시코 정부가 과도한 미국인 이주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하게 되자 1836년 미국인들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멕시코정부는 이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미국인들과의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서 텍사스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다. 텍사스공화국은 미합중국에 합병을 청원하여 1844년 미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텍사스의 미 합병승인은 멕시코를 자극하게 되어 1846년 미국을 공격하자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력이 약한 멕시코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리해 졌는데 설상가상으로 멕시코령인 캘리포니아에서 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멕시코는 미국과 1848년 '과달루페히달고 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이 조약에 의하여 미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광활한 미 서부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미합중국으로서의 영토를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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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1848년에 미국의 영토가 된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2만명 정도에 불과해 주로 승격될 수는 없었 다. 하지만 새크라맨토로부터 동북쪽으로 80킬로 가량 떨어져 있는 [아메리칸리버]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듬해인 1849년에는 10만여명에 육박해 1850년 캘리포니아는 미연방에 31번째 주로 가입하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필요치 않았던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자유주와 노예주 비율은 16대 15가 되었다. 이것 은 그동안 상공업을 위주로 발전해 온 북부의 자유주와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농업을 위주로 발전해 온 남부 의 노예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해 온 지역적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게 되었다.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 북부의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하여 미시시피, 플로리다, 루지애 나, 앨라배마, 조지아 등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 2월에 [남부연합]을 조직하고 미시시피 출신의 제퍼슨 데이비 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남부연합은 남부지역의 모든 연방정부의 재산과 요새를 공략하여 몰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1861년 3월4일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링컨대통령은 취임직후 남부연합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요새]에 지원군을 보내 대항했으나 결국 4월13일 남부연합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으며 이 전투를 시발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섬터요새에서 첫 무력충돌후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 텍사스주 등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 입하여 모두 11개 주가 되었다. 이후 남부연합은 로버트 리장군을 사령관으로 북부군을 공략하여 불런전투에서 크게 승 리하는 등 초기에 우세하였으나 앤티담전투를 계기로 북부군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승기를 잡자 1863년 1월1일을 기해 연방의 모든 노예들에게 "이날 즉시, 그리고 이후 영원히 자유를 부여 한다." 라고 선언하였다. 1863년 7월1일부터 3일간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하므로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 게 되었다. 게티즈버그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링컨은 게티즈버그의 격전지를 국립묘지로 지정한 후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 제를 지내고 그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라는 게티즈버그 연설을 하였다. 게티즈버그 전투후 계속된 패전으로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 연합군은 전투력을 상실하여 1865년 4월2일 리 장군은 수 도 리치먼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포위되어 4월9일 북부의 총사령관 그랜트장군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이 로서 남부연합은 해체되었으며 4년간의 남북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북전쟁 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 서부개척은 광부, 목축업자, 농민들의 대이주에 따른 인구증가 및 국토개발로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고 189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프런티어]가 소멸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에 추진된 정부의 친기업정책 및 대륙횡단철도 건설 등의 영향으로 급속히 공업화되면서 등장한 대기업가들의 활동으로 미국은 이제 유럽 열강들도 만만 히 볼 수 없는 산업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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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서부의 개척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프런티어 라인은 서쪽으로 네브래스카, 캔자스, 텍사스 부근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캘리포니아, 오리건 지역도 그 동부의 일부만이 개척되었을 뿐 로키 산맥이 걸쳐 있는 대서부는 미개척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서 부도 남북전쟁이 끝나고 극성스런 시대적 요구에 의해 서서히 정복되기 시작하였다. 1860년경에는 약 25만명의 인디언들이 서부의 평원과 산간 벽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일부의 백인들만이 정착하고 있 었는데 남북전쟁 중에 양군에서 탈영해 온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쟁이 끝난 후의 서부인구는 무시 못할 정도로 증가되었 다. 하지만 대서부의 개척에 선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골드러시'로 캘리포니아에 몰려온 광부들이었다. 이들 광부는 1848 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의 금을 캘리포니아에서 캐냈다. 또한 1858년에 콜로라도의 파이크스 피 크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10만여 명의 광부들이 모여들어 덴버와 같은 도시들이 생겨났다. '골드러시'가 끝난 후 대부분의 광부들은 농부로서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부의 텍사스로부터 캐나다에 이르는 대평원에서는 전후 20여 년에 걸쳐 소의 방목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소값은 동부 시장에서 마리당 40달러를 호가하였으나 텍사스에서는 3~4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몰이를 전문으로 하는 카우 보이들이 목축업자들에게 몰려왔고 그들도 나중에는 서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광부와 목축업자들에 이어 대서부에 옮겨온 사람들은 1862년에 제정된 자작농지법에 의한 농민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국유지에 5년간 거주하며 개척에 종사하면 160에이커의 토지를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1870년대 말부터 서부의 대평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10여년 동안에 대평원을 거대한 농경지대로 바꿔 놓았다. 백인들의 서부개척 과정에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인디언에 대하여 미 연방정부 는 전쟁 전부터 일정한 거류지를 결정하여 백인들과 격리시켰고 인디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필요할 때에는 반강제 적으로 조약을 맺고 그 땅을 점유하곤 하였다. 1862년에 미네소타주의 수우족이 반란을 일으켜 수백명의 백인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미정부는 수우족 전체를 다코 타 지방으로 추방하였는데 1874년 사우스다코다의 블랙힐즈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많은 백인들이 몰려들었고 수우족은 자신들의 지역을 침범한 백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으며 1876년 6월에는 수우족을 토벌하려던 카스터 중령의 기병 7연 대 264명이 수우족에게 전멸 당하기도 하였다. 인디언들의 조직적인 반항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최후를 장식한 것은 애리조나에 근거를 둔 아파 치족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용감하고 잔인했던 아파치족도 미육군의 위세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1886년 오 클라호마의 지정 거류지로 되돌아갔다. 아파치족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인디언과 백인과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 미 연방정부는1887년에 도오즈 개별토지소유법을 제정하여 인디언들이 농업으로써 자신들의 생활근거를 마련할 수 있 도록 하였으며 1891년에는 의무교육제를 실시하고 1894년에는 모든 인디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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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국가로의 발전
남북전쟁후 미국의 공업화는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북부는 미국의 풍부한 자원과 유 럽으로부터 밀려들어온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친기업적인 정책에 힘입어 미국을 산업국가로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철도산업이었다. 철도는 전후 미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크게 공헌하였다. 대륙횡단 철도의 필요성은 이미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때부터 논의되어 남북전쟁중인1862년에 의회가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의 설립을 인가하면서 그 건설이 시작되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는 네브라스카 의 오마하로부터 서쪽으로 공사를 진행시켰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는 캘리포니아의 세트라멘토로부터 동쪽으로 공사 를 진행시켰다. 미 대륙의 동서를 잇는 철도공사는 많은 난관을 뚫고 마침내 1869년 4월10일 유타의 프로몬토리에서 역사적인 접속이 이루어졌다. 이후로 미국의 철도망은 전국적으로 거미줄같이 퍼져나가 1900년에는 총길이가 32만Km에 이르렀다. 이 길이는 당시 유럽 전체의 철도길이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전세계 철도의 4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철도망의 팽창은 철도건설과 관련된 모든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상품 수송 능력을 배가 시킴으로써 기업의 발전은 물론 농업과 축산업까지도 산업화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농민들이 다른 시장을 겨냥하 여 대규모 생산을 하게 되어 농경기계의 발전속에 그 규모가 점차 커져 산업화되어 갔다. 축산업에도 산업화 현상이 나 타났다. 수송수단의 발전으로 중서부의 대평원의 목장에서 키운 소들이 오마하, 캔자스시티 또는 시카고의 도살장으로 보 내졌으며 냉동설비를 갖춘 철도편으로 동북부시장으로 보내졌다. 증기선박과 냉동기술의 발전으로 곡식은 물론 쇠고기같 이 상하기 쉬운 물품도 유럽시장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으며 통조림 공업의 발달로 과일과 채소 시장이 확대되었다. 증기기관에 거의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기술발전은 전신과 해저 전선이었다. 전신은 미국 내에서의 빠른 통신을 가능 하게 하였고, 1876년에 대서양에 부설한 해저 전선은 국제 통신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같은 수송과 통신의 변화는 미국 의 산업을 세계 상품시장으로 확장시켜 놓았다. 한편, 유럽으로부터 몰려든 이민자들이 미국의 산업화에 밑바탕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 지 미국으로 유입된 이민자수는 2600만명이 넘었다. 이민자의 대부분이 부양가족이 없는 근로연령층이었다. 이들은 열심 히 일하여 자신들의 장래를 개척하려는 사람들로서 당시 급속한 산업화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값싸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급속한 산업발전은 미국을 크게 변모시켜 국가경제는 팽창하였고 국민생활도 날로 향상되었다. 하지만 산업화의 이면 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상실을 외면한 체 대기업들은 오로지 기업의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들의 로비 에 의해 정치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지게 되었다. 그러자 사회 일각에서 급속히 변모된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려는[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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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미국
미국인들이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대두된 사회개혁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 유럽에서는 영토와 이권의 팽창에 의한 제국주의 시대가 열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이루어진 3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이루어진 3국 협상세력간에 사소한 문제에도 첨예한 대립을 보여 전쟁마저 불사할 위기를 빚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문제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던 하우스 대령을 유럽으로 보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의 정세를 살펴본 하우스 대령은 윌슨 대통령에게 "독일이 칼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 체 프랑스는 혁명에 몰입해 있고, 영국의 런던은 사교계의 행사에 도취되어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하우스 대령이 윌슨에게 편지를 보낼 때까지도 유럽에는 세계 전쟁이 발발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14년 6월29일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나드 황태자 부 처가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된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정부는 독일정부 로부터 무조건 지원의 약속을 받고 그 해 7월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어 독일도 8월13일 프랑 스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의 미국은 윌슨 행정부의 중립정책으로 오히려 상당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연합국들의 전수 물 자구입이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독일의 잠수함들이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전투구역 을 항해하는 연합국들의 여객선들을 격침시켜 미국인들의 희생이 생겨나게 되자 미국이 더 이상 방관할 수 만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읠슨 대통령은 1917년 4월에 열린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민들 에게 "미국이 이 전쟁에 참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협받고 있는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미국이 참전하였을 때 정규군은 22만, 주방위군은 45만명에 불과하였지만 징병제를 실시 한 결과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육군과 해군을 합쳐 약 500만 정도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주로 서부전선 일대로 투입된 미 육군의 전투성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 해군은 독일의 잠 수함 공격으로 인하여 전수물자 공급에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던 연합군의 수송선 사방에 구축함을 배치하 여 독일 잠수함들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연합군측의 해상작전으로 패색이 짙어진 독일이 러시와와 단독강화를 시도하자 윌슨은 연합국의 결속을 다짐하기 위하여 1918년 1월8일에 전후 평화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담은 '14개 원칙' 을 발표하기에 이르 렀다. 이 원칙은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리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수립하려는 기본지침으로 여 기에는 공개 외교, 해양의 자유, 자유무역, 군비축소,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국가간의 국경선 조정, 국제 연맹의 창설 등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원칙이 공식 발표되자 연합국들은 대대적인 환영의 뜻을 표시했으며 그 해 10월에 독일이 미국에 휴 전을 제의함으로서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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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번영과 위기
1차대전후 전쟁을 통한 기술의 발전은 미국에 번영의 길을 열어 줬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노동자, 이민자, 흑인 그리고 범죄문제로 번영과 위기를 동시에 겪게 된다. 전후 미국의 기업가들은 생산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치밀한 원가계산과 엄격한 품질관리를 통해 생산성과 능률 성을 높여 산업의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1920년에 웨스팅하우스 방송국이 대통령 선거전을 중계함으로써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가 193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 전체 가정의 40% 수준까지 보급되었다. 1927년에는 Charles A. Lindbergh가 뉴욕과 파리 간 단독비행 에 성공함으로써 항공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23년과 1929년 사이에 미국은 전세계 국가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여 같은 기간에 제조업에서의 전기소비는 70%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자동차의 보급이었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돈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에 불과하던 자동차는 1929년에 가구당 1대꼴로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1920년대 초에 이르러 포드자동차회사는 미 국 자동차의 60%와 세계자동차 생산고의 반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 미국 내의 급진주의 세력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1919년 시애틀에서 일어난 파 업을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대부분의 노동운동은 합법적이었으며 비교적 온 건했다. 그러나 극렬한 선동가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폭력을 휘둘렀고, 파괴를 서슴치 않았다. 지도적인 기업가나 정치가들을 해칠 목적으로 열면 폭발하는 소포를 사용하기도 하여 이른바 [빨갱이 소동(Red Scare)]을 야기 시 키기도 했다. 이렇게 수년동안 전개된 과격한 노동운동 속에서 가장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흑인들이었다. 1차대전 동안 다수 의 흑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죽순처럼 생겨난 공장의 일자리를 찾아 북부의 산업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퇴역 군인들의 귀향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흑인들은 일시에 해고되었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백인들은 흑인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노했다. 1919년 남부의 흑인들에 대한 린치는 극성을 부려 70여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으며 도시에서도 혼란과 폭력이 난무해 시카 고에서 발생한 인종폭동으로 백인 15명과 흑인 23명이 사명하였으며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켜 3개월동안 120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남북전쟁 직후 북부의 재건사업정책에 반발하여 남부의 반대자들이 조직하였던 K.K.K.(Ku Klux Klan)단을 1915년에 남부인들은 다시 현대판 K.K.K. 단으로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반항적으로 되어 가 고 있는 흑인들을 협박하는 일]을 주로 하였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미국생활에서 순수하지 못한 외국적인 여러 영향력들]을 몰아내려고 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1924년에 이르러 그들은 수백만명의 회원을 모으고 막대한 자 금을 무기로 하여 각 주의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K.K.K. 조직원들은 백색제복을 착용한 체 흰두건을 쓰고 불십자가를 휘두르며 흑인과 외국인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둘러 댔다. 이러한 전반적인 이민배척 분위기로 이민자들이 밀집된 대도시에서 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는 술의 제조와 판매를 전국적으로 금지한[금주법]이 1919년 제정되었다. 그러나 금주행위는 법으로 단속이 불가능하였으며 오 히려 시카고의 Al Capone와 같은 엄청난 범죄조직을 대도시에 구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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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뉴딜정책
1919년 1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비교적 안정된 번영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28년 불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미국인들은 이 를 단기적인 현상이라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10월23일 증권시장에서 마침내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불경기 속에서 과도한 주식투 기로 인하여 등락을 거듭하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식시장의 지주들의 자금출자 노력에도 불구하고 10월29일에 또 한번의 대폭락 사태가 발생해 마침내 주식시장이 붕괴되었다. 이로써 미국이 경기침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10여년간의 대 공황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당시의 후버 대통령은 연방정부 차원의 구호계획 실시를 거부하고 재건금융공사를 설립하여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융자를 확 대하고 주정부에 대한 여러 가지 구호계획을 지원하였지만 침체되는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 1932년 11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약속한, 당시 뉴욕주지사였던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루즈벨트는 농장폐쇄가 늘고 은행이 도산하는 어려움 가운데 취임한 후 자신이 선거공약으 로 제시하였던 공익회사의 규제, 주식거래에 대한 통제, 효율적인 정부 경제계획의 수립 등 그 당시로서는 대담한 시책들을 입 법화하여 시행해 나갔다. 루즈벨트는 대공황의 희생자인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1933년 3월 민간자원보존단 (Civilian Conservation Cops)을 창설하 여 전국의 청년들을 산림지방에 파견하여 식목, 홍수예방 등의 작업을 시키고 돈을 지불했다. 민간자원보존단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어 1941년까지 참가한 연인원이 200만명을 넘어섰다. 1933년 5월에는 연방긴급구호법 (The Federal Emergency Relief Act)을 제정하여 주 정부와 시 정부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화 하였다. 루스벨트는 그 동안 큰 논란을 빚어왔던 금주법을 폐지하고 맥주 판매를 허가했다. 음주판매로 막대한 국가수입이 생겼고, 상당 수의 실업자들이 음주사업과 연관된 일에 고용되었다. 술통이나 운반상자를 만들기 위해 수백 개의 제재소가 산림 주변에 건설 되기도 하였다. 루스벨트는 홍수를 제어하고 전기와 비료를 생산해 내는 [테네시계곡 개발공사]를 착수하는 한편, 정부 감독하에 산업을 자율 적으로 규제하여 경제를 소생시키려는 계획의 [국가부흥청]을 창설하였으며 약화된 농업부문에 활력을 넣기 위한 [농업조정법] 을 시행하였다. 경제의 붕괴로 사회보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1933년 8월14일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에는 은퇴노인들을 위한 [ 노령보험]과 의존적인 자녀들과 불구자들을 위한 [생존자보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뉴딜정책이 여러 가지 방면에서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대공황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1936년 어느 정도 경 기가 회복되는 듯이 보였으나, 다시 1937년 중반부터 불경기가 다시 찾아와 1938년에는 최악의 상태를 이루었다. 실업자는 전체 노동력의 20%인 1천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실업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수산업으로 인한 호경기가 찾아올 때까 지는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딜정책이 미국사에서 지니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뉴딜]은 경제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수동적이었던 국가 를 능동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소득분배의 공평을 기하고 사회보장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정치적으로는 하층 및 노동자 계급 이 크게 대두되었다. 뉴딜을 지지한 사람들은 바로 이 계층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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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미국인들이 대공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운이 감돌았다.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어려움 속에 놓여 있던 독일에 불만에 가득찬 국민을 등에 업고 히틀러가 나타났다. 그 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비증강에 착수하여 유럽정복의 야망을 불태우며 주변국들에게 독일인들이 거주하 고 있는 영토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다. 1935년 10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37년 일본이 선전포고없이 중국을 공 격하자 히틀러도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38년 4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9월에는 체코를 점령한 후 39 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유화정책을 추구 해왔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은 유럽의 분쟁에 또다시 휘말려 들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5년에 [중립법]이 제정되어 미국은 교전국에 대한 융자나 무기판매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1940년 대통령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전쟁에서 군수품과 무기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해 여론도 루스벨트의 편을 들었고, 마침내 의회는 많은표 차이 로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는 한발 더 나아가 소련에도 무기대여 혜택을 주기 위하여 의회를 설득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독일군과 맞서고 있는 두 전선에 군수물자를 제공하게 되었고 미 해군이 물자수송을 호위 한편 영국 선박에게 독일 잠수함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되자 41년 5월 독일 잠수함 들이 미국의 선박을 공격하여 격침되는 등 독일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 1937년부터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있는 중국에 동정적이었던 미국은 중국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한편, 일본에게는 매우 중요한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금지하였다. 일본은 미국에게 중국정부 지원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미국은 중국침공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등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마침내 1941년 12월7일 새벽,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시 작되었다. 일본 항공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이 공격으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향해 중이던 3척의 항공모함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손상을 입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8척의 전함이 파손되고 2 척은 완전히 침몰해 버렸다. 2천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1천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 국민들은 미 국의 참전을 즉각 지지하였고 전쟁수행을 위해 하나로 단결해 다음날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 하였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는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경제 대공황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꾸준히 군비증강에 힘써왔던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그 동안의 과잉생산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오히려 부족한 형편이 되었다. 막대한 군수물자 생산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가져왔고 실업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였다. 그 결과 1940년까지 만 해도 8백만이 넘었던 실업자는 방위산업의 수요와 군입대로 없어졌다. 1945년까지 군복을 입었던 남녀는 1200만이었다. 이제는 노동력이 남아서가 아니라 노동력이 부족하여 국가적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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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미국의 발전과 변화
승승장구하던 독일과 일본의 전세가 미국의 참전으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동인도, 태국 그리고 버마까지 점령한 후 1942년 5월 필리핀을 함락시켜 쿠릴열도에서 솔로몬군도 에 이르는 태평양 서쪽을 거의 절반이나 차지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일본이 미국의 공세로 산호세 전투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서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전선에서도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승리한 후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였 으며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합세하여 롬멜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있 었다. 승기를 잡은 연합국들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총지휘관으로 4,200여 척의 선박에 5개 사단병력을 동원해 1944 년 6월6일 새벽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독일은 이 작전에서 패퇴해 독일 본토마저 점령당하게 되자 45년 4월말에 히틀러가 자살하고 이로서 독일 군은 사실상 와해상태에 놓여 5월초에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한편, 미국은 승리를 눈앞에 둔 44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 3선의 루즈벨트는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를 물리치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선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아쉽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최 종적 승리를 보지 못한 체 45년 4월12일 조지아의 웜 스프링스에서 사망하였으며 부통령인 해리 트루먼 (Harry S. Truman)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였다. 유럽에서 승리한 미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였지만 일본이 응하지 않자 트루먼은 그간 비밀리 에 시험해온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8월6일 한 대의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 결과는 상상 을 초월한 것이었다. 하나의 원자폭탄으로 거의 10만명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자 8월9일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엄청난 파괴가 또 한차례 이루어졌다. 더 이상 항전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일본은 마침내 8월14일에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 계대전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1,600만명에 달했던 군인들이 미국으로 귀환해 노동시장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심각한 실업 문제를 우려했던 경제전문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미국경제는 전시경제에서 평시경제로 큰 무리없이 전환되어 갔다. 남자들이 가정으로 돌아오자 소득원이 늘어나 소득이 늘자 소비가 늘어났고 그 결과 미국 경제가 더욱 활 발해졌다. 미국인들은 그 동안 대공황과 전쟁으로 억눌려있던 소비욕구를 마음껏 분출해 저마다 주택, 자동차, 가전제 품 등을 구입하였으며 그 결과 주택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1949년에 이르러 자동차생산은 미국 역사 상 처음으로 500만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전후 계속된 발전으로 미국 역사상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전후 처리문제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고 독일의 절반을 차지한 소련은 공공연히 터키와 그리스 내의 공 산주의 세력을 지원해 주면서 혁명을 부추겼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 여 터키와 그리스 정부를 지원했다. 이후[트루먼 독트린]은 공산주의의 팽창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의 모든 곳 을 적극 지원한다는 미국의 기본정책으로 2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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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팽창과 냉전의 격화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자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 모여 전후문제에 대해 사전논의를 했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의 회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게 많은 양보를 해주었다. 영국의 처칠은 소련의 스탈린이 당시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 동유럽 일대에,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극동에 공산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점을 주시하며 시종일관 이를 저지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당시 2개의 임시 정부를 갖고 있던 폴란드의 독립문제에 있어서 처칠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거부하고, 스탈린이 지지하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였으며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갖는 대신 폴란드는 그 잃은 만큼의 영토를 독일영토에서 보상받도록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덧붙여 소련은 일본으로부터 쿠릴열도를 얻고, 중국으로부터는 군사기지와 그 밖의 많은 이권을 얻도록 양해되었다. 전쟁에서 많은 이권을 차지한 소련이 터기와 그리스에서 공공연히 공산세력을 키워나가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으로 반공정책을 펴나갔다. 한편, 미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대응도 중요하지만,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중에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며 이탈리아에서도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직접 눈으로 본 미국 의회는 마침내 1948년 4월에 이른바 '마샬 플랜 (Marshall Plan)'이라고 불려진 유럽부흥법 (European Recovery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유럽 16개국에 대해 1억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재정상태를 안정시키고, 국가들간의 교류를 증진시켜 경제적 부흥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 플랜이 발동된 이후 미-소간의 대립은 냉전(Cold War)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이 냉전에 대처하기 위하여 1947년 7월에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하여 육, 해, 공군을 통합하는 '국방성' '통합참모본부' '중앙정보국(CIA)'을 신설하였고, 이듬해 6월에 '평시징병법'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팽창일로에 있는 소련 공산주의에 위협을 느낀 미국을 포함한 서구제국들은 장차 발생할지도 모를 소련의 침공에 대비하여 1949년 4월에 상호방위조약인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하고, 가맹국들의 군대를 통합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유럽에서의 동서대립으로 격화된 냉전의 결과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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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후 한반도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1945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진주했던 미국과 소련군은 남북한에 정부가 각각 수립되자 1949년에 각자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북한의 소련군은 중화기로 무장된 군대를 양성해 놓은 다음 철수한 반면 미군은 남한의 이승만 정부가 북쪽으로 진격하여 무력통일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탱크나 대포 같은 공격용 무기들은 모조리 철수시켰다.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지 얼마 후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의 공산군이 소련의 지원 속에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략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남한 정부는 이렇다할 방어도 못한 체 소련 탱크를 피해 서울을 포기하고 급히 남하했다. 이쯤 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군 단독으로는 북한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고 남한의 방어를 위한 미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연합(UN)의 감시 하에 실시된 선거에 의하여 탄생하였으므로 국제연합군도 UN 창설 후 처음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연합군 사령관에는 미군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반격에 들어간 연합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10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투입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국제연합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쟁터에 있는 야전군 지휘관들과 워싱턴 행정부 사이에서 이번 전쟁의 목표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야전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주장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전면전쟁을 해서라도 중공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와 의견이 달랐다. "한국전쟁은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제한전쟁]일 뿐이다. 중공과의 전면전쟁을 피하고 대신 남한의 영토를 보존하는 정도로 전쟁을 한정시키자."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3월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알려왔다. "미국은 공산측과 협상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만주지역 폭격을 주장하는 한편 공산측의 항복을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의회에 제출하자 트루먼은 4월에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켰다. 이에 대해 미국 내 여론이 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해임 직후 실시된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69퍼센트가 맥아더를 지지하고 29퍼센트가 트루먼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민들은 해임된 후 귀국하는 맥아더를 개선장군과 같이 환영하였다. 맥아더는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옛 군가의 일절을 인용하면서 그의 입장을 밝혔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을 신속히 종식시키겠다고 공약했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53년 6월27일, 140여만명의 사상자로 남북한을 피로 물들인 체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의 입장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된 원래의 상태로 휴전되고 말았다. 참고: 1954년 4월13일 발표된 美國防省의 [韓國戰爭에서의 美軍 死傷者數] 발표에 따르면 美軍은 전사자 33,629명, 기타 사망자(실종자 포함) 20,617명, 부상자 103,284명으로 총 157,530명의 인적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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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시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는 취임연설에서 "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모든 국가들과 협력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하였으며 국민 모두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1929년 이래로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한국전쟁 등으로 계속된 시련을 겪어 왔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친기업적인 정책을 폈으며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1958년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함께 동서간의 팽팽하기만 해왔던 냉전에 해빙의 문을 열었다. 1959년에는 부통령인 닉슨이 소련을 방문하였으며 그 답례로 흐루시초프도 미국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빙의 무드는 1960년 5월 미국의 초고공정찰기 U-2가 정찰도중 소련의 영공에서 격추되는 상황이 발생해 양국간의 관계는 다시 냉랭해졌으며 58년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카스트로가 점차 반미-친소정책을 폄으로서 긴장감 마저 감돌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실시된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존 에프 케네디가 마흔세살의 나이에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차로 공화당의 거물 닉슨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젊고 의욕이 넘치는 케네디 대통령은 [New Frontier]를 주창했다. 이는 미국이 국내외적으로 당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먼저 미국내의 풍요 이면에 자리잡고있는 구조적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흑과 백의 인종차별을 과감히 철폐하는 한편 대외정책에서도 활발한 정책을 펴나갔다. 흑인들의 인권운동은 1954년 5월에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의 공학을 금지하는 남부의 법령은 위헌이다]라고 판결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는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키되 쌍방에게 평등한 시설을 제공해 준다면 헌법이 규정하는 법 앞에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던 1896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 이 판결은 남부인들을 흥분시켰지만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용기를 주었으며 흑인들은 자체적으로 흑백차별 폐지운동을 일으켰다. 55년 12월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한 [흑백차별버스 승차거부운동]은 1년여에 걸쳐 꾸준히 시행된 결과 버스 승차에 있어서 흑백차별을 폐지하였다. 하지만 일부 백인들의 흑백차별은 여전해 57년 9월에 [흑인학생 입학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9명의 흑인학생들이 아칸소주의 리틀록시에 있는 백인들만의 취학하는 고등학교에 입학신청을 하면서 일어났다. 시교육위원회가 이들에 대한 입학을 허가하려하자 주재판소에서 이를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연방순회재판소가 주재판소의 명령이 무효라고 판결을 내리자 이에 화가 난 주지사가 민병대를 투입하여 흑인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던 것이다.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은 이들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한 것을 주지사가 불복하자 1천명의 무장군인들을 리틀록에 투입하여 흑인학생들을 교실까지 호위하고 한 학기동안 학교를 순시하게 하였다. 62년 10월에 미시시피주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자 당시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는 63년 8월에 워싱턴 D.C.에서 20만명이 운집한, 시민권 보장을 위한 역사상 가장 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케네디는 이러한 흑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인권신장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가게, 식당 등의 공공시설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대우 및 차별고용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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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미국
1958년 쿠바에서 대학교수 출신의 젊은 혁명가 카스트로(Castro)가 독재적인 군사정권을 무너트리고 정권을 잡은 후 반미정책을 폄으로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에 놓여 있었는데 61년에 쿠바가 소련에게 미사일기지를 제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케네디는 즉각 쿠바의 해안을 봉쇄하고 쿠바를 공격하려는 강공책을 견지함으로서 미-소간에 긴장이 고조됐는데 케네디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하여 터키에 있는 미국기지를 철수하는 대신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철수키로 하는 좋은 외교적 성과를 얻어냈다. 젊고 패기에 찬 케네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저개발국가들의 빈곤이야말로 공산주의가 파고들 수 있는 가장 큰 허점이라며 1961년 3월에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창설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을 여러 국가에 파견하여 교육, 기술개발, 의료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인간을 달에 보내려는 '아폴로 계획'을 수립하는 등 미국인들에게 새롭고 무한한 세계에 대해 꿈과 이상을 심어주며 미국인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던 케네디는 애석하게도 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공산주의자 오스왈드(Oswald)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은 65년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해 미국의 국론을 분열시켰으며 격렬한 반전시위에 못 이겨 73년 1월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함으로서 월남은 75년 4월 월맹에 의해 공산화되고 말았다. 미국은 월남전을 통해 엄청난 전비지출과 인명피해만 입은 체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하는 치명적인 손해를 보았다. 상처투성이로 월남전을 종결시킨 닉슨은 74년 8월8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사임을 하고 카터행정부는 아랍국가들의 석유 횡포로 '에너지 파동'을 겪으며 무능한 대통령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80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레이건은 '힘을 통한 평화정책'을 추구해 8년동안 무려 2조 달러에 이르는 국방비를 지출한 결과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지만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미국을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계속된 대립과 경쟁관계도 닉슨-브레즈네프 선언을 계기로 완화되기 시작해 레이건 시대에 이르러 핵 감축시대가 열림으로써 보다 급격하게 긴장완화 무드가 조성되었으며 부시시대에 소련연방의 붕괴에 이은 미국-러시아간의 전격적인 합의로 마침내 냉전의 시대가 청산되었다. 전후 변화와 발전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세계 최강국'으로 자리를 잡은 미국은 91년 1월 이라크를 상대로 펼친 걸프전에서 최첨단 과학무기를 사용해 세계인들을 새삼 놀라게 하였으며 미국의 거대한 힘을 다시 한번 인식시켜 주었다. 미국인은 미국을 벗어나야 더 안전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은 마약과 범죄, 총기사고, 인종문제 등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아직도 많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여러 민족들이 모여서, 건국한지 불과 200여년 만에 전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주도해 나가고 있는 미국은 역시 세계 최고의 나라가 아닐 수 없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경기가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진정 행운아들이 아닌가 싶다. |